※ 프레시안과 술별닷컴에 동시 연재 중입니다. 두 곳의 내용과 사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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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명주들을 기대한다. 100번의 실패 딛고 과학으로 탄생한 ‘일월삼주’
[서형원의 우리술 탐방기] ④경남 함안 <빛올양조연구소>
▲직접 배양한 빛올효모를 보여주는 김비성 대표 ⓒ홍지숙
절정의 봄날, 동양 고전풍 판타지 게임 속에 뛰어든 듯 화려한 벗꽃 가지들이 시야를 채우고 물기 오른 여린 잎들이 환청처럼 재잘대는 섬진강변을 달려 함안 월촌리 <빛올양조연구소>를 방문했다.
30대 청년 양조인 김비성 대표가 여기서 탁주 '일월삼주 일주'(一月三舟 一舟)와 청주 '일월삼주 이주'를 빚고 있다. (이 연재에서는 우리나라 주세법의 ‘약주’를 우리 술의 원래 명칭에 따라 ‘청주’라고 부르고 있다. 직전 기사 참고.) 세 번째 배가 될 소주도 준비하고 있다.
일월삼주라는 말은 하나의 달을 세 배에서 바라본다, 부처는 하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은 그처럼 다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술을 빚어 탁주, 청주, 소주라는 세 변주를 만들어내기에 일월삼주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 월촌리(月村理), 달고을에서 빚는 세 가지 술이라고 봐도 좋겠다. 진주를 지나 월촌리를 흐르는 남강에 배 띄우고 달빛과 술을 즐기는 모습을 떠올리니 그것도 제법 낭만적이다.
이 연재는 크고 복잡한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는 우리 술의 미래, 그 지도에 새겨질 의미 있는 양조장과 술을 찾아보자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당장 흥미로워 보이는 신생 양조장을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첫 술을 내놓은 지 갓 한 해가 지난 1인 양조장을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빼어난 술맛 때문이었고, 술꾼들의 심상치 않은 반응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술이기에?
▲왼쪽 일월삼주 일주, 오른쪽 일월삼주 이주 ⓒ홍지숙
빛올양조연구소의 ‘일월삼주’
'일월삼주 일주'
- 탁주, 14.2도 350ml 유리병
- 제법 묵직하지만 상쾌하다. 신맛이 앞서고 단맛이 뒤따르는데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일월삼주 이주'
- 청주, 14.2도 350ml 유리병
- 깔끔하다. 신맛, 단맛, 산뜻한 향이 균형을 이룬다. 매실, 배, 포도 등의 과실향.
원재료
- 함안 친환경 오리농법 찹쌀, 전통누룩, 빛올효모.
- 빛올효모는 김비성 대표가 연잎에서 채취하여 직접 배양한 빛올양조연구소의 자체 효모다.
- 올해 중 자가 누룩 개발 예정, 향후 찹쌀 계약재배 계획.
제조법
- 찹쌀, 누룩, 빛올효모, 물만으로 한 번 빚어 45일 발효한 단양주
- 일주는 영하에서 1~2주 숙성하여 낸다.
- 이주는 맑게 여과하여 영하에서 30일 이상 숙성하여 낸다. 여과시 효모를 걸러 품질 변화를 줄인다.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신선한 과일을 통째로 베어 물어 생명력 넘치는 과즙이 입안을 채우는 감각? 또렷하고 상쾌한 산미와 뒤따라 이를 감싸는 단맛, 가볍지도 끈적이지도 않는, 마신다는 행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적당한 질감. 나는 이 술을 한입 가득 크게 들이키는 것이 즐겁다. 이 문단을 쓰는 지금 입안에 침이 흥건하고 마음은 이미 술 냉장고를 열고 있다.
누룩으로 빚은 우리 청주 중에는 다채로운 맛과 향을 가진 빼어난 술들이 적지 않지만, 일월삼주 이주처럼 선명하고 일정한 맛과 품질을 유지하며 자주 대중의 감탄을 자아내는 술이 아주 흔하지는 않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라 주막에서 고객들에게 자주 권하는 편인데, 한 잔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거나 바로 몇 병 더 꺼내 달라는 일이 잦다.
서른 중반의 이 청년은 어떻게 이 술맛을 만들어냈을까? 술꾼을 놀라게 하는 그 매력의 비밀은 무엇일까?
▲ 하나의 달을 세 배에서 본다. 한 독의 원주에서 세 술이 나온다. ⓒ빛올양조연구소
'일필휘지', 한 번에 빚는 단양주의 신선한 매력
“왜 단양주로 빚습니까? 단양주의 매력이 있습니까?” 김 대표에게 물었다.
단양주는 쌀, 누룩, 물로 한 번에 빚은 술이다. 쌀로 고두밥, 떡, 죽 등을 만들고, 누룩, 물과 잘 섞으면 시간이 흘러 술이 되는데 이렇게 한 번에 빚은 술이 단양주다. 한 번 빚은 술을 밑술로 삼아 고두밥, 떡, 죽 등으로 덧술을 할수록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오양주 등의 중양주가 된다. 그러니까 단양주는 가장 단순한 우리 술 제조법이다.
김 대표는 단양주만의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산미가 매력적이고 과실향과 단맛이 더 신선하다는 것이다. 단양주의 신맛은 짧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매력이 있다. 작업이 단순하고 효율적이어서 작은 양조장에 유리한 양조법이기도 하다.
공정이 단순하다고 해서 술빚기가 쉽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재료를 한 번에 넣고 승부를 봐야 하므로 실패 위험이 크다. 작은 변수로 술 한 통을 다 버리게 될 수도 있다. 김 대표도 최근에 술 한 통을 날리는 낭패를 겪었다. 두 가마 넘는 쌀과 발효제, 900병의 술, 무엇보다 귀중한 한 달 이상의 노력이 날아갔다. 이 일 이후 적극적인 계획을 세우려 할 때마다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단양주는 일필휘지로 그리는 그림과도 같다. 일은 간단하겠지만 실패할 위험이 크다. 숙련도가 아주 높아야 한다. 반면 섬세하게 붓질을 더해 그림을 완성하듯, 덧술을 더해 중양주를 빚으면 실패 확률이 낮고,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며, 깊은 풍미를 가진 고급주가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월삼주, 꽃잠, 서촌막걸리 등 현재 유통되는 단양주들은 뚜렷한 매력으로 술 좀 안다는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술들은 신선함과 생명력이라는 매력을 공유하고 있다. 김 대표의 일월삼주는 신선하고 깔끔한 단양주를 빚되,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길게 하여 맛과 향을 풍부하게 살려내고 있다.
청주인 일월삼주 이주는 발효 후 맑게 걸러내는 여과 과정에서 효모까지 촘촘하게 걸러낸다. 이런 과정이 술맛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병입 후의 변질을 막는다. 확실히 이주는 다른 우리 청주에 비해 맛의 복잡성은 덜한 대신 주된 맛과 향들이 뚜렷하다.
맛의 선명함 때문에 대중들의 반응이 즉각적이다. 한 모금으로 ‘맛있다!’는 감탄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이 맛에는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다. 주막 손님들에게 종종 묻는다. ‘이런 맛을 가진 세계의 다른 술을 맛보신 적이 있으세요?’ ‘글쎄, 없는 것 같네요.’ 나는 이 술에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낼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00번의 실패로 시작하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어린 아들을 끌고 산에 다니던 아버지 덕에 김 대표는 자연에 가까운 삶을 꿈꾸었고, 대학 시절 귀농을 결심했다고 한다. 귀농하면 음식도 술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김 대표는 허영만 만화 “식객”에 실린 술 빚는 법을 보고 처음 술을 빚게 되었다. 하지만 맛이 없어 실패. 10년 전 일이다.
여기서 김 대표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계속 실패하면서도 100번을 넘게 술을 빚었다고 한다. 술 빚는 법이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데 왜 안 되는 거냐고. 공짜 술이라고 좋아하는 친구들도 물론 있었지만 김 대표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나보다.
▲허영만 “식객” 중 ‘탁주’ 편. 김비성 대표는 식객의 레시피로 양조를 시작했다. 김 대표는 주인공 성찬과 묘하게 닮았다.
2015년에 부산 막걸리학교에서 처음 술 빚기를 배우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되고, 그해 전국 가양주 주인 선발대회에서 입선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주관하는 궁중술빚기 대회에 두 번 도전하여 2018년 이화주를 빚어 대상을 차지했고, 국세청 양조기술교육과 가양주연구소 최고지도자과정을 밟으며 취미에서 직업으로 나아갔다. 귀농과 창업을 위한 준비도 병행했다.
2020년 빛올양조연구소를 창업하고 다시 2년을 준비해 2022년 3월 첫 술을 출시했다. 새벽을 사랑하는 김 대표가 빛이 올라온다는 의미로 빛올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빛과 ‘오가닉’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래 치열하게 준비한 만큼 술 잘 빚는다는 자신감이 컸으나 한 해 여러 일을 겪은 지금은 그런 자신감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술 양조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복잡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요소들이 우연과 필연을 오가며 상호작용하는 작지만 거대한 생태계를 다루는 일이다. 감히 누가 나는 양조를 잘 안다거나 술 빚는 일에 자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김비성 대표가 무균 작업대 ‘클린벤치’에서 빛올효모를 관리하고 있다. ⓒ빛올양조연구소
과학으로 빚은 술
창업 이전에 김 대표는 부산대 식품생화학연구실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효모와 양조에 관한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 과정이 큰 자산이 되어 빛올양조연구소의 고유 효모를 발견하게 되었고 우리 양조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과학실험 장비들도 갖추게 되었다.
정밀한 조건에서 효모를 배양하거나 새로운 술을 실험 발효하는 ‘인큐베이터’(배양기), 효모를 키우는 무균 작업대인 ‘클린 벤치’, 배지로부터 효모를 분리하는 ‘센트리퓨즈’(원심분리기), 효모의 양을 정밀하게 계량하는 ‘흡광도 분석기’ 같은 낯선 실험장비들이 양조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직접 발견한 우수 효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빛올양조연구소의 실력을 보여준다. 연엽주를 빚는 과정에서 김 대표가 발견한 효모 중 우수한 효모를 선별 배양하여 빛올효모라는 이름을 붙였다. 흔히 쓰는 건조효모가 아닌 생효모를 쓴다. 발효 초기에 알코올 생산 능력이 매우 빼어나며, 술의 오염 가능성을 줄여준다. 단양주는 신맛이 지나치기 쉬운데 알코올의 빠른 생성으로 신맛을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한다.
잠깐 설명하자면, 쌀 등의 곡물로 술을 빚는 일은 전분을 당분으로 분해하는 ‘당화’와, 당분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전환하는 ‘알코올 발효’라는 두 과정으로 이뤄지는데, 효모는 알코올 발효를 담당한다. 전통누룩에는 당화를 맡는 누룩곰팡이와 발효를 맡는 효모가 모두 들어 있어 이 두 과정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이렇게 누룩만으로도 술을 빚을 수 있지만 김 대표는 여기에 효모를 추가하여 알코올 발효 능력을 보완한다.
건평 200여 평의 양조장은 골조 외엔 아버지와 김 대표가 모두 직접 지었고, 고두밥 식히는 장비 등도 직접 만들었다. 자체 효모 외에 누룩도 올해 완성을 목표로 직접 개발하는 중이다. 규모가 커지면 찹쌀도 계약재배로 조달하겠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1인 공장으로서는 꽤 큰 양조장을 매우 청결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자는 방이 지저분해 주무시고 가라고 못하겠지만, 양조공간은 최선을 다해 청결하게 관리합니다.” 김 대표의 말이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끝없는 도전과 배움,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사랑하는 성실함, 연구하는 자세와 과학 장비의 도입, 기본 중의 기본인 완벽한 청결과 위생 관리. 일월삼주라는 멋진 술이 우리에게 온 과정은 이렇다.
▲‘센트리퓨즈’. 효모를 키우는 영양원인 배지로부터 효모를 원심분리 한다. ⓒ홍지숙
명주 명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좋은 술을 빚었으니 큰 야심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김비성 대표의 계획은 소박한 편이었다. 우선 함안과 경남에서 인정받는 지역 대표 양조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 7도의 대중 막걸리와, 함안의 솔잎 등 부재료를 이용한 증류소주를 출시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연구소라는 이름대로 양조와 발효제에 관한 다양한 연구과제를 받아 수행할 계획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지은 이 양조장에는 아직 100평 넘는 공간이 남아 있다. 생산규모를 늘려 좋은 술을 더 싼 가격으로 내놓고 싶다고 한다. 참 고마운 말씀이다. (일월삼주는 비슷한 다른 술에 비해 비싸지 않은 편이고, 대체로 좋은 술들의 가격은 계속 치솟고 있다.)
청춘이란 빛올양조연구소에 아직 비어있는 100평의 공간처럼 그의 앞에 남아 있는 거대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성실과 연구로 도전과 배움을 거듭하고 있는 그의 발길이 어디까지 가 닿을지 궁금하고 설렌다.
홍 대표와 나는 백양사 아랫마을에서 명주 ‘장성만리’를 빚으시는 임해월 선생의 해월도가에서 향기로운 하룻밤을 보내고 섬진강을 따라 함안 빛올양조연구소에 왔다. 그 덕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일월삼주를 마시고 또 권하면서 늘 감탄하지만 내가 이 술을 감히 명주라 불러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김비성 대표는 이미 빼어난 양조인이지만 첫걸음 내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우리 술 명인이 될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마 내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있다. 이 고을 저 고을에서 우리 술 명인들이 성장하고 있겠구나. 수많은 명주가 쏟아져 나오겠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청년들이 우리 술 양조에 뛰어들고 있다. 그 한 사례를 김비성 대표와 빛올양조연구소에서 오늘 확인한 셈이다.
명주 명인은 어떻게 탄생할까? 역사가 전해준 전통의 술 빚기, 좋은 재료, 도전과 실패, 경험과 배움. 그리고 이제는 과학, 이것들이 명주 명인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 대표는 우리에게 양조 공간 구석구석을 자신 있게 공개했다. 그만큼 완벽하게 청결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홍지숙
향기로운 술은 영혼의 틈으로 스며든다.
좁고 긴 유리잔에 일월삼주 이주를 채운다. 반병쯤 넉넉히 채워도 좋다. 차분히 숨을 내쉬고 길게 들이킨다.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다 비강에서 피어난다. 농염한 과즙 같은 술맛이 혀에 닿았다가 입안을 채우고 폭발한다. 술은 내 몸 어딘가 영혼의 빈틈을 스며들어 채우는 듯하다.
어른들이 ‘글라스’로 들이킨 '쏘주' 반병도 그의 고단했을 영혼을 채웠을 것이다. 쓴 술로 몸을 괴롭히는 일이었겠지만 그때는 그 씁쓸함과 괴로움마저 위로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그들의 고된 시절 덕에 오늘 내가 향기로운 술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향기로운 술은 영혼의 빈틈에 스며들어 나를 다독이며 쉬게 한다. 그리하여 내일은 또 신선한 하루로 떠오른다.
▲낮달 떠오른 빛올양조연구소에서 홍지숙 술별닷컴 대표, 필자, 김비성 빛올양조연구소 대표. (왼쪽부터) ⓒ홍지숙
※ 프레시안과 술별닷컴에 동시 연재 중입니다. 두 곳의 내용과 사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프레시안 연재 보기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2283458?sid=103
새로운 명주들을 기대한다. 100번의 실패 딛고 과학으로 탄생한 ‘일월삼주’
[서형원의 우리술 탐방기] ④경남 함안 <빛올양조연구소>
▲직접 배양한 빛올효모를 보여주는 김비성 대표 ⓒ홍지숙
절정의 봄날, 동양 고전풍 판타지 게임 속에 뛰어든 듯 화려한 벗꽃 가지들이 시야를 채우고 물기 오른 여린 잎들이 환청처럼 재잘대는 섬진강변을 달려 함안 월촌리 <빛올양조연구소>를 방문했다.
30대 청년 양조인 김비성 대표가 여기서 탁주 '일월삼주 일주'(一月三舟 一舟)와 청주 '일월삼주 이주'를 빚고 있다. (이 연재에서는 우리나라 주세법의 ‘약주’를 우리 술의 원래 명칭에 따라 ‘청주’라고 부르고 있다. 직전 기사 참고.) 세 번째 배가 될 소주도 준비하고 있다.
일월삼주라는 말은 하나의 달을 세 배에서 바라본다, 부처는 하나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은 그처럼 다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의 술을 빚어 탁주, 청주, 소주라는 세 변주를 만들어내기에 일월삼주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곳 월촌리(月村理), 달고을에서 빚는 세 가지 술이라고 봐도 좋겠다. 진주를 지나 월촌리를 흐르는 남강에 배 띄우고 달빛과 술을 즐기는 모습을 떠올리니 그것도 제법 낭만적이다.
이 연재는 크고 복잡한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는 우리 술의 미래, 그 지도에 새겨질 의미 있는 양조장과 술을 찾아보자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당장 흥미로워 보이는 신생 양조장을 잘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첫 술을 내놓은 지 갓 한 해가 지난 1인 양조장을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빼어난 술맛 때문이었고, 술꾼들의 심상치 않은 반응 때문이었다. 대체 어떤 술이기에?
▲왼쪽 일월삼주 일주, 오른쪽 일월삼주 이주 ⓒ홍지숙
빛올양조연구소의 ‘일월삼주’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신선한 과일을 통째로 베어 물어 생명력 넘치는 과즙이 입안을 채우는 감각? 또렷하고 상쾌한 산미와 뒤따라 이를 감싸는 단맛, 가볍지도 끈적이지도 않는, 마신다는 행위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적당한 질감. 나는 이 술을 한입 가득 크게 들이키는 것이 즐겁다. 이 문단을 쓰는 지금 입안에 침이 흥건하고 마음은 이미 술 냉장고를 열고 있다.
누룩으로 빚은 우리 청주 중에는 다채로운 맛과 향을 가진 빼어난 술들이 적지 않지만, 일월삼주 이주처럼 선명하고 일정한 맛과 품질을 유지하며 자주 대중의 감탄을 자아내는 술이 아주 흔하지는 않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은 편이라 주막에서 고객들에게 자주 권하는 편인데, 한 잔 맛보고 새로운 세계를 만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거나 바로 몇 병 더 꺼내 달라는 일이 잦다.
서른 중반의 이 청년은 어떻게 이 술맛을 만들어냈을까? 술꾼을 놀라게 하는 그 매력의 비밀은 무엇일까?
▲ 하나의 달을 세 배에서 본다. 한 독의 원주에서 세 술이 나온다. ⓒ빛올양조연구소
'일필휘지', 한 번에 빚는 단양주의 신선한 매력
“왜 단양주로 빚습니까? 단양주의 매력이 있습니까?” 김 대표에게 물었다.
단양주는 쌀, 누룩, 물로 한 번에 빚은 술이다. 쌀로 고두밥, 떡, 죽 등을 만들고, 누룩, 물과 잘 섞으면 시간이 흘러 술이 되는데 이렇게 한 번에 빚은 술이 단양주다. 한 번 빚은 술을 밑술로 삼아 고두밥, 떡, 죽 등으로 덧술을 할수록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오양주 등의 중양주가 된다. 그러니까 단양주는 가장 단순한 우리 술 제조법이다.
김 대표는 단양주만의 매력이 있다고 말한다. 산미가 매력적이고 과실향과 단맛이 더 신선하다는 것이다. 단양주의 신맛은 짧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매력이 있다. 작업이 단순하고 효율적이어서 작은 양조장에 유리한 양조법이기도 하다.
공정이 단순하다고 해서 술빚기가 쉽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재료를 한 번에 넣고 승부를 봐야 하므로 실패 위험이 크다. 작은 변수로 술 한 통을 다 버리게 될 수도 있다. 김 대표도 최근에 술 한 통을 날리는 낭패를 겪었다. 두 가마 넘는 쌀과 발효제, 900병의 술, 무엇보다 귀중한 한 달 이상의 노력이 날아갔다. 이 일 이후 적극적인 계획을 세우려 할 때마다 또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단양주는 일필휘지로 그리는 그림과도 같다. 일은 간단하겠지만 실패할 위험이 크다. 숙련도가 아주 높아야 한다. 반면 섬세하게 붓질을 더해 그림을 완성하듯, 덧술을 더해 중양주를 빚으면 실패 확률이 낮고, 알코올 도수가 높아지며, 깊은 풍미를 가진 고급주가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월삼주, 꽃잠, 서촌막걸리 등 현재 유통되는 단양주들은 뚜렷한 매력으로 술 좀 안다는 사람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술들은 신선함과 생명력이라는 매력을 공유하고 있다. 김 대표의 일월삼주는 신선하고 깔끔한 단양주를 빚되,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길게 하여 맛과 향을 풍부하게 살려내고 있다.
청주인 일월삼주 이주는 발효 후 맑게 걸러내는 여과 과정에서 효모까지 촘촘하게 걸러낸다. 이런 과정이 술맛을 더 선명하게 만들고 병입 후의 변질을 막는다. 확실히 이주는 다른 우리 청주에 비해 맛의 복잡성은 덜한 대신 주된 맛과 향들이 뚜렷하다.
맛의 선명함 때문에 대중들의 반응이 즉각적이다. 한 모금으로 ‘맛있다!’는 감탄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이 맛에는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다. 주막 손님들에게 종종 묻는다. ‘이런 맛을 가진 세계의 다른 술을 맛보신 적이 있으세요?’ ‘글쎄, 없는 것 같네요.’ 나는 이 술에 세계인의 감탄을 자아낼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100번의 실패로 시작하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어린 아들을 끌고 산에 다니던 아버지 덕에 김 대표는 자연에 가까운 삶을 꿈꾸었고, 대학 시절 귀농을 결심했다고 한다. 귀농하면 음식도 술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김 대표는 허영만 만화 “식객”에 실린 술 빚는 법을 보고 처음 술을 빚게 되었다. 하지만 맛이 없어 실패. 10년 전 일이다.
여기서 김 대표의 성격이 드러나는데, 계속 실패하면서도 100번을 넘게 술을 빚었다고 한다. 술 빚는 법이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데 왜 안 되는 거냐고. 공짜 술이라고 좋아하는 친구들도 물론 있었지만 김 대표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나보다.
▲허영만 “식객” 중 ‘탁주’ 편. 김비성 대표는 식객의 레시피로 양조를 시작했다. 김 대표는 주인공 성찬과 묘하게 닮았다.
2015년에 부산 막걸리학교에서 처음 술 빚기를 배우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게 되고, 그해 전국 가양주 주인 선발대회에서 입선하면서 배우고 성장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한국가양주연구소가 주관하는 궁중술빚기 대회에 두 번 도전하여 2018년 이화주를 빚어 대상을 차지했고, 국세청 양조기술교육과 가양주연구소 최고지도자과정을 밟으며 취미에서 직업으로 나아갔다. 귀농과 창업을 위한 준비도 병행했다.
2020년 빛올양조연구소를 창업하고 다시 2년을 준비해 2022년 3월 첫 술을 출시했다. 새벽을 사랑하는 김 대표가 빛이 올라온다는 의미로 빛올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빛과 ‘오가닉’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래 치열하게 준비한 만큼 술 잘 빚는다는 자신감이 컸으나 한 해 여러 일을 겪은 지금은 그런 자신감을 내려놓았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 술 양조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복잡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요소들이 우연과 필연을 오가며 상호작용하는 작지만 거대한 생태계를 다루는 일이다. 감히 누가 나는 양조를 잘 안다거나 술 빚는 일에 자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김비성 대표가 무균 작업대 ‘클린벤치’에서 빛올효모를 관리하고 있다. ⓒ빛올양조연구소
과학으로 빚은 술
창업 이전에 김 대표는 부산대 식품생화학연구실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효모와 양조에 관한 실험과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 과정이 큰 자산이 되어 빛올양조연구소의 고유 효모를 발견하게 되었고 우리 양조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과학실험 장비들도 갖추게 되었다.
정밀한 조건에서 효모를 배양하거나 새로운 술을 실험 발효하는 ‘인큐베이터’(배양기), 효모를 키우는 무균 작업대인 ‘클린 벤치’, 배지로부터 효모를 분리하는 ‘센트리퓨즈’(원심분리기), 효모의 양을 정밀하게 계량하는 ‘흡광도 분석기’ 같은 낯선 실험장비들이 양조장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직접 발견한 우수 효모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빛올양조연구소의 실력을 보여준다. 연엽주를 빚는 과정에서 김 대표가 발견한 효모 중 우수한 효모를 선별 배양하여 빛올효모라는 이름을 붙였다. 흔히 쓰는 건조효모가 아닌 생효모를 쓴다. 발효 초기에 알코올 생산 능력이 매우 빼어나며, 술의 오염 가능성을 줄여준다. 단양주는 신맛이 지나치기 쉬운데 알코올의 빠른 생성으로 신맛을 적절한 수준으로 관리한다.
잠깐 설명하자면, 쌀 등의 곡물로 술을 빚는 일은 전분을 당분으로 분해하는 ‘당화’와, 당분을 알코올과 이산화탄소로 전환하는 ‘알코올 발효’라는 두 과정으로 이뤄지는데, 효모는 알코올 발효를 담당한다. 전통누룩에는 당화를 맡는 누룩곰팡이와 발효를 맡는 효모가 모두 들어 있어 이 두 과정을 동시에 진행할 수 있다. 이렇게 누룩만으로도 술을 빚을 수 있지만 김 대표는 여기에 효모를 추가하여 알코올 발효 능력을 보완한다.
건평 200여 평의 양조장은 골조 외엔 아버지와 김 대표가 모두 직접 지었고, 고두밥 식히는 장비 등도 직접 만들었다. 자체 효모 외에 누룩도 올해 완성을 목표로 직접 개발하는 중이다. 규모가 커지면 찹쌀도 계약재배로 조달하겠다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1인 공장으로서는 꽤 큰 양조장을 매우 청결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자는 방이 지저분해 주무시고 가라고 못하겠지만, 양조공간은 최선을 다해 청결하게 관리합니다.” 김 대표의 말이다. 쉽게 만족하지 않는 끝없는 도전과 배움,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사랑하는 성실함, 연구하는 자세와 과학 장비의 도입, 기본 중의 기본인 완벽한 청결과 위생 관리. 일월삼주라는 멋진 술이 우리에게 온 과정은 이렇다.
▲‘센트리퓨즈’. 효모를 키우는 영양원인 배지로부터 효모를 원심분리 한다. ⓒ홍지숙
명주 명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좋은 술을 빚었으니 큰 야심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김비성 대표의 계획은 소박한 편이었다. 우선 함안과 경남에서 인정받는 지역 대표 양조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알코올 도수 7도의 대중 막걸리와, 함안의 솔잎 등 부재료를 이용한 증류소주를 출시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연구소라는 이름대로 양조와 발효제에 관한 다양한 연구과제를 받아 수행할 계획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지은 이 양조장에는 아직 100평 넘는 공간이 남아 있다. 생산규모를 늘려 좋은 술을 더 싼 가격으로 내놓고 싶다고 한다. 참 고마운 말씀이다. (일월삼주는 비슷한 다른 술에 비해 비싸지 않은 편이고, 대체로 좋은 술들의 가격은 계속 치솟고 있다.)
청춘이란 빛올양조연구소에 아직 비어있는 100평의 공간처럼 그의 앞에 남아 있는 거대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성실과 연구로 도전과 배움을 거듭하고 있는 그의 발길이 어디까지 가 닿을지 궁금하고 설렌다.
홍 대표와 나는 백양사 아랫마을에서 명주 ‘장성만리’를 빚으시는 임해월 선생의 해월도가에서 향기로운 하룻밤을 보내고 섬진강을 따라 함안 빛올양조연구소에 왔다. 그 덕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일월삼주를 마시고 또 권하면서 늘 감탄하지만 내가 이 술을 감히 명주라 불러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김비성 대표는 이미 빼어난 양조인이지만 첫걸음 내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우리 술 명인이 될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마 내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있다. 이 고을 저 고을에서 우리 술 명인들이 성장하고 있겠구나. 수많은 명주가 쏟아져 나오겠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많은 청년들이 우리 술 양조에 뛰어들고 있다. 그 한 사례를 김비성 대표와 빛올양조연구소에서 오늘 확인한 셈이다.
명주 명인은 어떻게 탄생할까? 역사가 전해준 전통의 술 빚기, 좋은 재료, 도전과 실패, 경험과 배움. 그리고 이제는 과학, 이것들이 명주 명인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김 대표는 우리에게 양조 공간 구석구석을 자신 있게 공개했다. 그만큼 완벽하게 청결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홍지숙
향기로운 술은 영혼의 틈으로 스며든다.
좁고 긴 유리잔에 일월삼주 이주를 채운다. 반병쯤 넉넉히 채워도 좋다. 차분히 숨을 내쉬고 길게 들이킨다.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다 비강에서 피어난다. 농염한 과즙 같은 술맛이 혀에 닿았다가 입안을 채우고 폭발한다. 술은 내 몸 어딘가 영혼의 빈틈을 스며들어 채우는 듯하다.
어른들이 ‘글라스’로 들이킨 '쏘주' 반병도 그의 고단했을 영혼을 채웠을 것이다. 쓴 술로 몸을 괴롭히는 일이었겠지만 그때는 그 씁쓸함과 괴로움마저 위로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그들의 고된 시절 덕에 오늘 내가 향기로운 술을 즐긴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향기로운 술은 영혼의 빈틈에 스며들어 나를 다독이며 쉬게 한다. 그리하여 내일은 또 신선한 하루로 떠오른다.
▲낮달 떠오른 빛올양조연구소에서 홍지숙 술별닷컴 대표, 필자, 김비성 빛올양조연구소 대표. (왼쪽부터) ⓒ홍지숙